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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04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이트에 갔던 날 5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이트에 간 날은 가고 싶어 간 날이 아니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이트가 아닌 예전 80년대 정서가 흠씬 묻어나는 극장식당 나이트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90년대 국산 폭력물에 자주 등장하시는 밤무대 가수가 등장하는 높은 스테이지가 있고 그 아래쪽에서 사람들이 룰루랄라 지화자를 외치며 막춤을 추는 그런 곳 말씀이다. 그런 곳이 2000년도에도 존재는 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형식과 구색은 바뀌었을지언정 비슷할 것이다. 두번 다시 방문한 적이 없으니 모르겠지만.
내가 그 곳을 가게 된 것은 처음 전근갔던 회사에서 땅끝마을을 방문하기 위해 한 참 아래로 내달리다가 전라 해남(경남 남해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늘 두 군데 지명을 헛갈린다)의 어느 지역을 방문하면서부터였다. 나름대로는 풍류남아라고 주장하는 최고위상관의 명에 따라 하룻밤 뻑적지근하게 놀아보자고 해서 인사계...아니 인사담당관이 찾아낸 곳이 이름도 알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아, 놀라워라였다.
꽃바꾸니 옆에 끼고 나물캐는 아낙네와 할마시들과 할배들과 아저씨들이 모두 한데 어우러져 대동잔치를 벌이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에서는 사이키델릭한 조명이 그들의 모습을 스톱모션으로 팍팍 끊어주면서 [데드 얼라이브 전원일기 판]을 찍고 있었으니 그들이 추는 춤사위는 우리네 고유의 선과 장단도 아니요 외국의 디스코도 차차차도 아니었으되 손과 팔은 가락과 리듬에 맞추어서 사방팔방 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니 가히 그 광경은 발리의 집단군무 축제와 다름이 없었고 가끔 나오는 마카레나 (이건 또 뭐시냐)의 멜로디만 나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던 광경이었다. 하지만 같이 간 일행들도 계속 외지인임을 고수하지는 않았으니 나도 퍼특 정신을 차려보니 그 좀비떼와 혼연일체가 되어 국적불명의 각기춤을 추고 있었다. 오호라 이것이 댄스로 대동단결이구나!

그러다 갑자기 노래가 끊기고 사이키 조명이 딱끊겼다.
사회생활 초짜였던 나는 그게 휴식시간인 줄 알고 돌아가려는 찰나 불르스의 아련하고 콧털간지르는 음색이 귓가를 스쳤고 나는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으니
아까까지만해도 중구난방 이리저리 찔러대던 선남선녀들이 모두 손에 손을 붙잡고 쌍쌍이 손을 마주잡고 춤을 추며 무대를 천천히 배회하고 있었다. 오호라. 블루스타임. 사실은 모두가 이 시간을 기대하고 온 것인가. 그 경황중에 급하신 어르신들은 중앙무대위까지 점거하며 가무삼매경에 빠져 있었으니 이것이야말로 가히 신선세계의 풍류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저러나 일행중에 가장 어린 축에 속할 뿐 아니라 그 나이트에서도 가장 어린 축이었을 법한 나는 손 잡을 이 하나 변변히 없었고 그냥 뒷짐지고 구경할 수 밖에 없었는데 차라리 그것이 내게는 속편한 시점이었으니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저렇게 몸을 달싹 붙여서 춤추면 사단이라도 날 줄 알던 순진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뒤에서 왕고참 누님이 여기서 혼자 뭐하냐고 내 손을 붙잡고 질질 댄스장 한 가운데로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닌가! 아니 누님 집에 애가 둘이나 있는데 예서 이 뭐하는 일이오, 황망하오 남녀간에 도리가 있는데 어쩌구 하면서 혼자 별 생각을 다 했지만 까라면 굴러서라도 까야했던 그 시절에 내가 뭔 재주로 왕언니 섬섬옥수를 거절하랴 .
그냥 한 곡 땡겼다.

춤이라고는 대학시절 스포츠 댄스 뒤에서 청강하던 것 밖에 없어 왈츠스텝 기본밖에 모르는 처지였지만 정작 블루스라는 것은 스텝이 필요없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발이야 케세라세라였고 문제는 허리와 손의 위치였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지만 왕언니는 세상만사 초탈한 표정이었고 그냥 춤이나 추고싶어 나온 것이었고 나는 혼자서 이만저만오만가지 상상을 다 하면서 이 누님이 왜 이러나 가정사에 불만이 있나 애가 문제가 있나 직장생활에서 압박이 있는건가 아니면 첫 들어온 신입사원에게 무슨 흑심이라도 있는것인가 하면서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면서 맴돌았던 기억만이 생생하다. 첫 나이트의 추억은 참으로 기묘한 경험이었다. 아마 그 날 이후 나는 나이트 쪽에는 발도 안 들였다. 이것도 트라우마일까?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갑자기 추워지는 오늘 아침 그 생각이 났다.
출근하면서 헤롱헤롱 대며 택시에 몸을 싣고 가던 중년의 선남선녀를 보고나서 쓴 글이 절대 아니라는 것만을 밝히고 싶을 뿐이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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