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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07 낭만에 대하여 5
밤까지 놀고 집에 들어오는 길에
지하철 막차가 집으로 가는 두 정거장 전에 끊겨 버렸다.

설상가상 지갑에 돈이 없었다.
갑자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염치불구하고 어디서 돈이나 빌려서 택시를 타고 갈까 누구를 불러서 차라도 가지고 나오라고 할까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사람이 좀스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어차피 멀지도 않은 길이고 언덕배기 하나 넘으면 되니까 그냥 걸어가자고 결론을 내리고
(사실 내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 대안 아닌가)
그냥 걸어서 집에 왔다.

아, 춥더라.

추운 길을 혼자 뚜벅뚜벅 걷다가
예전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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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모두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지만
그 날 십년이 훨씬 넘은 추운 겨울날
눈발이 풍풍 날리던 도로 위에서 세명의 사내가 모여서 앉아 있었다.

그냥 갑자기 뜬금없이 그 중 누군가가 이렇게 말을 했다.

"우리 포장마차나 찾아서 닭발이나 시켜 먹읍시다."

이의 제기하는 사람 아무도 없었고
그렇게 결정짓고 차 한대를 가지고 나와서
가장 포장마차가 많이 있을 법한 여의도로
자정이 되어가는 시간에 눈발을 맞으면서 차를 몰았다.

그냥 닭발이 먹고 싶었던 게 아니라
포장마차를 가고 싶었던 우리는
여의도까지 차를 몰고 돌아다니며 이 골목 저 골목을 뒤지며
포장마차를 찾았다.
그러다가 결국 한 대도 못 찾고 다시 집으로 2시쯤 되어 돌아왔지만.

당시 그냥 뭔가를 하고 싶었던 나이에 포장마차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었다.
하지만 그냥 몰고 나갔더랬다.
그게 좋았으니까.
그리고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현실적인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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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오밤에 고개를 지나며
맨 처음 돈이 떨어졌을 때 생각했던 괴이한 생각에 대한 부끄러움이 커져간다.
어른들의 생각.
하긴 마흔이 다 되어가니 어른이 하는 생각이 맞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속에서부터 거부감이 들게 되는 생각.
[돈]이라는 물건에 대한 비정함과 속성에 대해서 어디서부터인가 모르게 사상이 틀어진 것을
발견하는 것이 그리 기분좋은 일이 아니다. 편함에 대해서, 이것저것 가장 좋은 솔루션을 찾는
선경험적 행동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어른들의 생각일진대
그냥 왠지 모르게 부끄럽다.
아니,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가?

돈이 없으면 걸어가는 거다. 그게 당연한 거다.
그리고 한 때는 그게 즐거웠던 때가 있었다.
성취를 못해도 좋으니까 그냥 가는 것이 즐거운 시절이 있었고
내가 눈썹을 찡그리면 그게 뭔지 아는 사람들이 있었고
내가 실패한다 하더라도 별다르게 [내가 가진 것]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는 이들도 적었다.

듣고 싶은 노래를 듣고
일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발길이 가고 싶은 곳을 가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스스로가 합당했고 자부했던 시절.
이제는 사라져 버린 시절에 대한 추억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른들은
[차마 다시 못할 것 같은 과거사]를 [낭만]이라고 바꿔 부르는 모양이다.

집에 오니
별로 춥지 않다.

* 회사까지는 못가겠군...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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