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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18 10

작은 방 한담 2009. 9. 18. 00:18
1.
어디선가 회식을 하는 모양이다.
나름대로 넥타이까지 매고 근사하게 보이는 인간들이 점잖게 술잔을 돌리기 시작한다.
술잔을 돌리는데 주역인듯 싶은 좌장은 이미 얼굴이 벌개져 있는 상태고 남직원들은 행여
눈밖에 날까봐 오버하면서 술잔을 받아 낼름 받아넘기고 다음 사람에게 건네고
남자에게 지느니 웃장까고 죽을 기세인 여성들도 낼름 받아 더욱 큰 소리로 웃어제끼며
다음 사람에게 주기 위해 원샷을 한다. 지금은 2010년, 올림픽을 앞둔 쌍팔년도가 아니다.

독작은 낭만이고
대작은 대화이지만
세명 이상은 죄악의 창궐함이다.

먹는 사람은 몰라도
보는 사람은 짜증스럽다.




2.
화장실에 들렸다가 1번에서 나온 듯 한 사내들이 대화하는 걸 들었다.
풋풋하니 아직 젊다.

"나 오늘까지 같은 멤버로 사흘 연장이다"

"....."

먹고 살기 위해 위장에 알콜을 붓는 짓거리만큼
인간으로 태어나 비참한 게 별반 없긴 한데
아마 저 친구들은 건강검진에서 간수치가 비정상으로 나올때까지 마셔야
비로소 술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 전에 먼저 가는 놈들도 있고.
혹은 그 전에 조직을 뛰쳐나올 놈들도 있겠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도 사회생활 초반에 정말 엄청나게 퍼 마셧다.
그게 일인줄 알았고, 잘 마시는게 능력인 줄 알았다.

위벽에 구멍 세 개 뚫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허리까지 부서진 뒤에
회사를 때려치고 나서야
알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냥
넥타이를 맨 앳된 얼굴들이 불쌍해 보였다.
너희들이 술 마시러 회사 들어간 건 아니잖니...




3.
하지만 나도 그 자리에 술마시러 간 거였다.
일을 벗어나서 전혀 일과 관련없이 그냥
소소한 대화를 나누려고.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서 조용히 대화하면서 마시면
술은 여간해서 취하지 않는 물건이다.
술을 마시기 위한 선제조건이 긴장과 걱정에 대한 반대급부라면
그 술은 100% 영락없이 취하더라.
누군가는 회식자리에 있는 것을 잊기 위해 술에 취하듯이.

즐겁게 마셔줄 수 있는 사람이 그래서 필요하더라.
입에 털어넣는 술보다
밖으로 나오는 말들이 많아야 술이 덜 취하더라

그래야
기분좋게 헤어지고
다음날도 기분이 좋은 것이더라.

술벗은
또 다른 의미에서
막역지우만큼이나 찾기 힘든 것이더라.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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