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 마는
왠지 한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다시 못 올 곳에 대하여

-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 中 - 


1. 
모든 일은 눈이 내리는 날 시작되었다.
하늘이야 당연히 눈을 내리거나 비를 내리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햇빛이라도 쨍쨍하게 만들어주는 게 
일이니 멀쩡한 하늘에게 화풀이할 수는 없지만 사실 그랬다. 
 
  난  1년에 몇 번, 누가 밟고 가 납작해진 개똥을 보면서도 처연함을 느낄 정도로 감상적이 되는 때가 있다. 
이 상황에 지나간 추억의 끄트머리가 미늘처럼 입술 끝에 걸려 빠지질 않고 설상가상 하늘에선 눈이 내려 [먹고 사는 냉엄한 현실]을 인식하는 이성을 날려버린 날이었다. 인화(人和)와 천시(天時)가 맞춰진 때가 아닌가. 그럼 지리(地利)를 얻어야지.

- 가자 동해로. 바다를 보러 가자

감정이 지배하던 날, 난 일사천리로 여행을 결정해 버렸다. (뭐...일도 없고.)

버스로 2시간만에 갈 수 있는 길을 6시간 반짜리 영동선 기차를 예약하고 꾸물꾸물 기어서 동쪽 바다를 보고, 이 고질같은 감상을 날려버리던가. 이도저도 안 되면 그냥 감상에 푹 빠져서 백사장에 머리라도 박고 대성통곡을 하던가 둘 중의 하나를 하고 나면 뭔가 시원해질 것 같았다. 아, 잡설은 집어치워야겠다. 그냥 바다가 보고 싶었다. 좋지 않은가. 겨울바다. 

2.
 
비내리는 호남선 영동선에 몸을 실으러 청량리 역을 찾은 게 10년 만이었다. 동해를 못 간 지는 20년이 넘었지만 야간열차는 10년 전에 태백 옆 통리까지 가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여행이란 늘 다르지 않은가. 하물며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지났는데.

근데 10년동안 사람만 변한 게 아니었다. 역의 시스템 자체가 변해있었다.
인터넷으로 발권예약을 했기에 극장처럼 가서 누르면 뽑힐 줄 알았는데 이게 웬 걸. 자판기는 요지부동이다.
아무리 서서 쳐다 봐도 작동법을 모르겠다. 결국 철도체계를 알 법한 아가씨한테 전화를 했다.

"ooo양, 이거 작동을 어떻게 하는거야?"
"그냥 하면 되죠"
"??? 안되는데?"
"아니 그냥 하면 되지."
"그냥 하니까 안 돼"
"왜 안되요?"
"안되니까 안 되지."
"안되긴 왜 안되요?"
   
무슨 스무고개 하는 것도 아니고, 하여간 두 사람의 [왜 되냐 안되냐]를 가지고 투덜거리다가 결국 편법으로 어떻게 표를 끊는데 성공했다. "제 친구들은 잘만 하던데 아저씨는 왜 못해용" 이라는 말에 "아저씨니까" 라고 대답하려다 그만 뒀다. 환경에 익숙해지지 못하면서부터 아저씨라는 호칭에 익숙해지는 법이니.


대합실은 한산하기 그지없고, 심지어 내 또래나 젊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고 그나마 생명력이 있어보이는 이는 나와 스님 한 분 뿐이었다. 평일의 영동선이라는 것이 이용하기 쉬운 곳인가.
그렇게 얼빠진 듯 앉아 있는데 갑자기 마스크를 쓴 아저씨가 내게 슬쩍 다가오더니
"공장! 공장! 120, 120"
이렇게 말을 하고 옆으로 슬쩍 사라진다.

인생 막장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청량리 대합실에서 구직을 원하는 사내의 눈망울이라도 내게서 보았던 걸까.


차 시간이 다가오고 사람들은 조금씩 불어나고, 역은 조금씩 사람들로 북적대기 시작한다. 얼른 차 시간에 맞춰 기차로 내려갔다. 

예전 부타양이 추천해 준 책 한 권을 [노르웨이의 숲]대신 끼고 조용히 앉아 출발과 동시에 책을 읽으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혹시 아는가. 나와 같이 뜬금없는 감상에 휩싸여 드넓은 동해를 보고 싶어 기차에 탑승하는 긴 생머리의 묘령의 아가씨라도 옆자리에서 만날 행운이 있을 지. 그러면 같이 여행할 권리에 대해서 토론을 해 볼 수 있지 않겠나. 호젓한 열차 안에서.



"여기가 내 자리래요?"
걸쭉하니 들려오는 강원도 말씨.
돌아보니 맘 좋게 생긴 할머니 한 분이 내 옆자리를 보면서 히죽 웃고 계신다.
아, 여기 맞는 모양이네요.

역시 여행은 출발부터 사람의 환상과 달라지기에 여행인 것이다.

기차는그렇게 서울을 떠나기 시작했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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