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저께 칼 뵘이 지휘한 모짜르트의 레퀴엠을 듣고 있었다.
느리다. 그런데 느리다는 말 외에 다른 것이 붙는다. 그냥 연비가 떨어져서 느린게 아니라
음악 자체에 무게감이 실려서 둔중하게 굴러오는 느낌이 있다.
거대한 빙산이 두리둥실 배 앞으로 밀려오는데 천천히 다가오는 걸 보면서도 피할 도리가 없을 때 느끼는 기분
비슷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장중한 칼 뵘이라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남들이 느리다고 해서 내가 느리게 인식하는 것일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Dies Irae(분노의 날)을 가지고 카라얀이 연주하는 것과 칼 뵘의 연주하는 부분을 계속
연달아 들어봤다. 한 10번인가 들어봤는데 계속 들으니까 확실히 차이점은 발견이 되더라.
차이점은 느림과 빠름이 아니라 자로잰 듯한 화성의 딱딱 끊어짐과 절도있음에 대한 차이같았다.
카라얀은 칼로 음절을 썰듯이 분배의 강약이 정확하게 들어가는 반면
칼 뵘은 커다란 실린더가 돌아가듯 소리가 서로 엮이면서 들어간다. 스피드의 차이는 아주 미미하지만
전체적인 중량감이 거기에서 차이가 나는 듯 했다. 뭐가 좋고 그르다는 것을 따질 역량은 못 되니까 여기까지.

레퀴엠중에서  분노의 날을 꽤 좋아한다.
(개인적으로는 베르디의 분노의 날이 더 좋다...그냥 폭주하는 광분의 날!)
모짜르트의 레퀴엠중 [분노의 날]은 CD로 듣기 전부터 웬지 귀에 익었던 노래였던 기억이 있다.
CD로 맨 처음 들었을 때 이 노래를 들으면서
내가 이 노래를 왜 기억하고 있나? 오옷, 설마 내게 볼프강의 영혼이라도 빙의되었던 것인가? 
하는 착각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었으나...

나중에 찾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일단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서 귀에 익었던 것이 첫번째고,
두번째는 대학시절 오락실에서 죽어라 파댔던 [아랑전설2](최초의 한국인 태권도 캐릭터 김갑환이 나온다...^.^v)의
마지막 최종보스 스테이지에 나오는 음악이 바로 모짜르트의 레퀴엠 [분노의 날]
(얼마나 많이 죽었으면 그 음악이....)



*나중에 나온 아랑전설 스페셜에서는 스테이지 계단에 관현악단이 웅크리고 연주하고 있는게 나옴*

결국 알게 모르게 여기저기에 산재되어있는 잡다한 지식들은
어느 날 계기가 맞게 되면 한데 뭉쳐져서 하나의 얼개를 이루게 되는 법

그래서 오덕질은 실보다 득이 많은 것일수도 있는 것이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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