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엔 별달리 알려지지 않은 장르지만 [미니어쳐 게임]이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미니어쳐 모형들을 가지고 전략전술을 세워서 싸우는 일종의 보드게임인데
미국이나 유럽쪽에는 상당수의 매니아들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미니어처 종류들도 참으로 광범위한 것이
헨리5세가 자기 장병들에게 광전사버프를 시전하던 아쟁쿠르 전투부터
나폴레옹의 정복전쟁, 미 독립전쟁까지 수 많은 종류가 등장한다.

사실, 난 여기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어쩌다 [워해머2000]을 PC게임으로 하다가 피규어를
찾아보던 중 미니어쳐 게임이라는 장르가 있고 수 많은 미니피규어들이 있다는 정도만
알게 된 것일 뿐.

그러던 중,
굉장히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니어쳐 조형사 중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페리 형제]가 있다.
(미니어쳐 한 개가 500원짜리 동전만 하다. 경이로운 디테일을 자랑하는 물건들임)
이 양반들이 사무라이 유닛을 만들었는데...뭔 생각이 들어서인지 갑자기
임진왜란의 상대편인 [조선군]을 디자인해 보려고 했던 거다.

-
이 양반들이 조선군 만드는데 자료가 없더라는 거지.
일본쪽 사료하고 우리나라 드라마나 그런 자료하고 봐서 맨 처음에 뚝딱 만들어 낸 것이

우리도 익히 봐온
[장수는 갑옷으로 무장하고 병졸은 블랙앤 화이트 평복]
그런데 더 이상의 유닛을 만들수가 없는 것이다...자료가 없으니까!

-
여기서부터 사건이 발생한다.
미니어쳐 모형에 관심이 있고, 우리나라 전쟁사에 관심이 있는 국내[마니아]들이
"페리 브라더스, 우리나라 임란시대 복식고증은 그게 끝이 아니삼!"
하면서 가지고 있는 사료와 이미지들을 페리형제에게 보냈다.

페리형제는
"아, 고맙삼! 이런걸 우리가 찾던 거임!" 하면서 자료들을 미니어쳐에 반영하기 시작함.

http://www.perry-miniatures.com/index2.html
이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레인지에 조선군 유닛이 따로 들어가 있고 그 안에 그동안 사람들이
보내준 자료를 기반으로 정리한 중세 조선군 미니어쳐가 들어가 있음.

그래서 결국 이번에 [임진왜란 미니어쳐 게임]이 나온다고 한다.

여기저기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조선군의 편제에 대해서 사람들이 설왕설래했던 모양이다.
"아니, 조선군에 저런 병제가 있었냐. 한국에 저런 게 있었다는 건 첨 들어본다" 부터
"중국사료를 한국으로 잘못 알고 도용한 것 아니냐"는 말까지.

페리형제는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자기들 사료를 가지고 우리에게 보내준 것이다"라는 친절한 멘트를 남겼더라.
(그냥 인터넷에 [페리 미니어쳐]라고만 쳐도 수두룩하게 글들이 나온다. 원형사 페리 형제의 실증자료에
 대한 전문가적 태도 + 우리나라 네티즌들의 정성이 그득그득 묻어나는 글들을 숱하게 볼 수 있다.)
-
내 입장에서는

정부에서 예산 처발라서 빤짝빤짝 눈이 부셔 쥐쥐쥐쥐쥐 하는 겉포장 용기를 생산해 내는 것보다
이런 쪽이 훨씬 우리나라를 알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관제정책은 민간의 interest를 따라잡지 못한다. 어떻게 해서든 뭔가를 창출해 내야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탄생한 [방법]은 개인의 호기심과 지적충족을 위해 만들어진 유희에 대해서 한없이 무력하고 열등한 법이다. 정부가 할 수 있는 건 밥을 짓는 일이 아니라 그냥 땔감하고 쌀을 가져다 주는 일 뿐이다. 왜 너희들이 밥을 만들어서 수저에 얹어 입을 벌리고 들이 밀려고 하는 건지?

게임도 마찬가지.
예전에 [닌자 블레이드]를 하면서 느꼈던 생각이 오늘도 반짝 머리를 스쳐간다.
문화컨텐츠라는 것이 무얼까? 사람들에게 접근이 쉬운 부분, 흥미를 갖기 쉬운 부분부터 시작해서 점점
전문성을 띄고 들어가고 그 안에서 매니아를 양산할 수 있는 범위까지 확장가능한 재료와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문화컨텐츠 아님? 누가 타이틀을 만들어 달랬어?


하긴 조선 시절 마상편곤이 무언지 아는 공무원보다 집 근처 부동산 가격이 얼마인지 아는 공무원들이 더 많겠지.
더군다나 이런시절엔.

Posted by 荊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