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터미널에 들려서 책방 근처를 배회할 일이 생겼다. 생일선물로 책을 사주려고 근처를 돌아다니다 보니 영풍문고 옆의 신나라레코드가 오늘자로 폐업을 한 것이 보였다. 셔터를 반 쯤 내려놓은 사이로 이리저리 장식대가 넘어진 채 해체되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음반시장이 고사한 지 하루 이틀인가. 그나마 남은 음반들은 MP3로 음원을 다운받던가 인터넷 서점에서 구매를 하는 것이 너무나도 익숙한 현실이 되어버린 지금, 어쩌면 음반가게의 쇠락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마져 들었다.

처연한 마음 가누지 못하고 영풍으로 들어섰는데 이게 웬 일. 다음주를 마지막으로 영풍문고도 폐업을 한다는 것이다. 강남 고속터미널 지하1층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영풍문고가 문을 닫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게다가 여기는 늘 사람들로 붐비지 않았더냐. 뉴스를 찾아보니 임대료를 이기지 못한 모양이다. 풍설에 의하면 서점 자리에 작은 서점들과 기타 다른 것들이 들어올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다. 하여지간, 신나라레코드로 모자라 연거퍼 정신적 타격을 받아서 집에 돌아올 때 종내 꿈인지 생시인지 아득하였다. 동시에 뭔가 끝나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발품을 파는 시대가 끝나가는 것이다. 눈으로 실물을 확인하고 하나하나 손끝의 촉감을 동원하여 지식의 축적을 하는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책이라는 것, 음반이라는 것은 원래 집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창고에 수백수천가지의 종류를 쌓아두고 그 곳에서 한참을 고심하며 내게 맞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종류의 지식취득이었다. 한참을 걷고 서서 쳐다보고 꺼내보고 다시 서가나 음반대에 꽂아두기를 반복하며 갈등하다가 하나를 선택해서 집에 오는 과정이 그간 내 삶의 당연한 결과물이었건만, 이제는 그것이 사라지는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예전 동네에 살 때 동네 서점과 동네 음반가게가 망할 때 느꼈던 가슴아리는 심정은 이제 찾을 수 없다. 그것보다 지금은 뭔가 막막하고 무섭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전자는 거대한 자본에 의해 작은 영세 지식상들의 몰락을 처연하게 지켜보는 감정이었다면, 지금은 패러다임이 바뀌고 지식습득의 단계가 급변하는 시대에 던져진 낡은 세대라는 생각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이다. 조만간 CD는 사라질 지 모르고 종이책이 사라질 시기가 올 지도 모른다.

솔직히 CD의 보관연한보다 디지털로 리핑한 음원이 훨씬 보관기간이 길고 (하드만 바꿔서 옮겨주면 이론상으로는 영원히 보관이 가능하지 않은가) 종이책보다는 전자책이 보관과 검색에 훨씬 용이하지 않은가. 그러한 편리함의 시대 속에 적응을 못한다면 그것이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이미 음반사와 출판사는 바뀌는 패러다임에 적응을 했을 것이고 (적응을 한 자들만 살아남을 것이고) 젊은 세대들은 그러한 과정에 익히 익숙해져 있을 것이며 아직 접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쉽게 전환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쉰세대처럼 어리버리 옛것만 고집하며 살 지도 않으리라. 이미 리핑은 하고 있고, 전자책도 내 손아귀 안에서 움직이는 때가 곧 도래하겠지. 적응을 못하면 예전 내 아버지들이 컴퓨터를 보면서 두려워하던 그 시대의 모습을 할 수 밖에 없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뭔가 부서져 나간 것 같은 아픔이 느껴지는 걸까. 자본의 힘 아래 지식과 사상이 종속되어 온 것이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건만, 정작 실물로 내 앞에 나타나는 옛 방식의 해체라는 것이 달갑지 않은 것일까. 위험한 미래에 대한 불안일지도 모른다.인터넷 서점에서 정해진 것중에 하나만을 꺼내서 찾아봐야 하며, 상품리스트에 없으면 구매를 포기해야 하는 소비의 획일화 & 지식의 평준화가 두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헛헛한 것이니까.

책방 주인도 모르는 구닥다리 책을 구석탱이에서 찾아내어서 계산하던 시절의 감동은 이제 맛보지 못할 것이다. 이젠 절판된줄 알았던 CD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내 손으로 끄집어내던 순간의 희열같은 것은 이제 없으리라. 이것은 내가 삽십년 이상 해 왔던 시간의 추억. 행동의 잔재. 그리고 그 가운데 말로 표현못해도 몸으로 알고 있는 삶의 동선중 하나가 끊어지고 있음에 대한 한탄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우리는 도시마다 있는 도서관에 가서 문헌을 확인하는 일이 필요없을지 모른다. 아마도 모든 것이 내 구석진 방 한 군데에서 일어나고 끝을 맺을 것이다. 더 이상 같은 목적을 띈 사람들 사이를 활보할 필요가 없을 지 모른다.

편리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게 있을까.  

아니, 다른 게 없을까.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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