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쩌다 일이 있어서 근처 사무실에 들렀다.
아는 직원 하나 있었다. 처자다.
"잘 지내오."
"예"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깔대기로 빠져서 결국 연애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내 보아하니 최근에 노상에서 같이 다니던 총각 하나 있는듯 하오이다."
"아, 그냥 착한 친구예요."
"별 관계 없이 착한 친구요?"
"그렇지요. 세월이 수상하다보니 밤까지 근무하면 바래다 주곤 하옵니다."
그냥 거기까지 말의 단락을 짓고 넘겼는데
곰곰 돌아와 혼자 사무실에 앉아 생각하니 참 누군지 불쌍하였다.
그 위인이 사해동포주의와 측은지심을 앞세운 인의지도를 가는 군자라면야 내 무슨 흠을 잡으리오만
과연 그 친구는 그런 단심으로 푸르른 대나무처럼 인생을 사는 사람일지.
만약에 그것이 아니라면 말 그대로 그 친구는 공주를 지키는 테라스 아래 파수꾼일진대
주야장천 사시사철 호위해 봤자 나중에 공주를 채가는 건 낯짝도 모르는 왕자일터.
그냥 [착한 친구]라는 말이 그것을 반증하지 아니하는가.
속내로는 나와 대화한 처자가 타인에게 맘을 들킬까 저어해 그 친구를 그냥 아무 관련없는 이라
낮춰 말한 것이리 하고 믿고 있는 중이다. 처자의 처지나 눈높이야 내가 어찌 알 바 아니지만
그냥 그러고 사는 남정네는 불쌍하지 않은가. 만약 그 사내에게 일푼이라도 연모의 정이 있다면.
사내건 짐승이건 한번 눈을 마주친 이가 인연이라 생각하는 머저리임은 분명하지만
스스로의 선택을 빙자해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슬픈 일이 어디있으랴.
하기사 슬퍼보이는 건 제3자들의 눈이지 본인들은 정작 그렇게 생각 안하리라. 희망은 아편과 같으니.
-2.-
"아들, 혹시 바깥에 나가 볼 요량이 있는가?"
"바깥이라면 어딜 말하시는 것입니까?"
"산 너머 바다건너 이국을 말하는 것이네"
"거기에 가면 무엇이 있습니까?"
"그곳에서 같이 누군가가 일할 사람을 찾는데 어떠한가?"
"뜬금없는 말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좋지 않겠나."
사흘에 한 번 자식을 못 보면 금새 병이라도 들 것 같던 부모 입에서
멀리 타국이라도 나가 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순간.
한 때는 아들 스스로가 나가겠다 해도 장남이 타국엘 어찌 나가느냐 한사코 말리던 분들이
이제는 그런 말도 스스럼없이 할 정도가 되었다.
한 번 나가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이래봤자 두 세달.
과연 그런 것을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 견디실려나.
희망은 아편과 같은 것이다.
무언가 그럴듯한 게 자식에게 맞겠거니 생각하면
부모는 나이나 처지에 관계없이 그것을 자식에게 대 보기 시작한다.
제 3자의 눈으로 보면 그 또한 서글픈 일 아니겠는가.
-3.-
가끔은 이루지 못하는 소망임을 스스로가 인지하거나
어렵기 그지없음을 객관적으로 알고 있더라도
"나는 그렇지 않으려니, 우리는 그렇지 않으려니" 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뭉뚱그린 채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
누군가는 이뤄지지 못할 사랑으로 청춘을 갉아먹고
누군가는 이뤄지지 못할 꿈으로 시간을 허송세월하며
대부분은 잡지 못할 돈에 대한 꿈으로 평생을 소비한다.
내가 제3자가 되면 그 어두움과 허탄함을 보겠으나
내가 스스로 올무에 목을 걸고 있을 때는 전혀 그렇지 못한 게 인생이려니.
해바라기라.
이 참 서글픈 단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