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의 [모나리자]를 들어본 것이 아마 80년대 말일거라고 생각난다.
가요계의 황제. 당시 조용필의 별명이었다. 그는 그 때나 지금이나 전설이었다. 하지만 그 때 모나리자를 처음 들었던 내 느낌은 그런 것과는 좀 거리가 있던 감상이었다.

그대는 나의 사랑을 받아 줄수가 없나~ 어쩌구 이렇게 나가는 후렴구를 처음 들으면서 10대였던 나는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기분이 나빴던 이유는 단순했다.
인류사에 남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작, [모나리자]라는 위대한 예술품을 저딴 유행가의 제목으로 써먹다니!
믿기지않겠지만 이 이유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그대는 나의 사랑을 받아 줄수가 없나~ 어쩌구 하면서 나가는 조용필의 애절한 후렴구가 왜 그렇게 싼티나게 들리던지. 아, 이건 예술에 대한 모독이야 어쩌구 하면서 중학생인지 고등학교1학년인지 하는 나이의 인간이 그렇게 마구 잣대를 남발하고 있었다. 
사실, [모나리자]라는 노래는 조용필의 노래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냇 킹 콜도 동명의 노래를 불렀더랬다. 그런데 하여간 나는 가사를 알아들을 수 있는 조용필의 노래가 무척이나 예술적 권위를 침해한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런 걸 듣는 너희 대중들은 모두 무지몽매해! 하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2.
세월이 지나고 20대 30대가 끝나갈 무렵, 조용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삶과 인생의 역정을 나름대로 겪으면서 내가 보지못하던 것이 인생의 여정에서 보이기 시작하니까 조용필의 노래와 가사들이 다시 보이고 새삼스럽게 들리더라. 아, 노래가 노래가 아니구나. 그냥 흥얼대는 풍월이 아니구나 그 생각이 들면서 노래들이 새삼 달리 보이더라. 하긴, 이게 당연한 것이지. 중고등학교때 조용필의 [단발머리]나 [못찾겠다 꾀꼬리]를 듣는다고 뭘 알것이며 굶어 죽더라도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죽겠다는 말이 대체 뭔 씨나락인지 알게 뭐냐. 나이대에는 그 나이에 볼 수 있는 것이 있는 것이다. 모나리자. 나는 조용필의 그 노래가 무슨 뜻인지 이제 충분히 이해 할 나이가 되었다.

3.
바꿔 말하면 젊은 시절의 순수라는 것은 일종의 양면성이다. 순수하기 때문에 고집도 세고, 편벽한 자기만의 가치를 가지기 마련이다. 정치적인 견해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 정의를 위해 분연히 일어서는 김주열같은 청춘도 있는 반면, 총통의 모든 행동은 게르만을 위한 선의라고 믿는 유겐트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뭐라고 할 수 있는 계재가 아니다. 인간은 원래 보고 듣고 안 만큼 넓어지는 것이 아니랴.


4.
20대의 보수화, 10대의 생각없음. 우리 때는 안 그랬던가. 마찬가지다. 그들이 과연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나이를 먹으면서 머릿속으로 흡수하고 경험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사회 시스템에 대한 경도된 생각을 나이먹고 끝까지 가져갈 정도로 천편일률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 사회라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두는 사회라면 어린아이들의 삐딱한 사고를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믿는다. 인생의 경험만큼 좋은 선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나의 걱정은 그 선생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국가의 미래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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